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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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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인물

  1. 옹진의 향토사

북도면

김연산(金連山 1884~1967)
장봉 출신이다. 무의촌인 장봉에서 치료조차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신음하는 주민들을 위하여 고명한 한의를 찾아가 침술과 한방을 배워 고향 장봉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을 사람들의 병을 돌보는 것을 보람으로 삼았다. 그가 죽자 도민들이 크게 애도하면서 장봉도민장으로 인장하였다.
김옥현(金玉賢 1844~?)
한말의 무인. 1875년 강화 초지진 포대 초관(哨官)으로 초지진 해안을 불법 침범한 일본 보트에 사격을 가해 운요호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결국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직한 후 부하 김영옥·채명준·남은순·남은옥 등과 신도 고남리에 정착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용감한 애국정신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서창식(徐昌植 생몰년 미상)
북도면 출신이다.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항일운동의 선각자로 향리인 북도민 교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1935년 북도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도 평생을 후세 교육에 바쳤다. 그의 공적을 기려 1958년 교육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
조선 말기의 문신, 대문장가로 알려졌다. 본관은 전주(全州). 소명(小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鳳藻), 호는 영재(零齋)이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 등이 있다. 1885년 모도에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방비(永世不忘碑)가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호승(李浩承 1878~1939)
북도면 신도리 출신으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맹,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하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윤응념(尹應念) 등과 함께 경기 부천군 계남면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연평면

기형도(奇亨度 1960~1989)
연평도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윤동주문학상 등 교내 주최 문학상을 받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에 근무하는 동안 여러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1990), 『기형도 전집』(1999) 등이 있다.
박만업(朴萬業 1909~1951)
연평도에서 출생하여 연평도 반공청년으로 1950년 9월 8일 아군 함대에 태극기를 몸에 간직한 채 헤엄쳐 가서 함포사격을 막은 주인공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방위특공대를 조직하고 작전과장이 되어 해주시를 경비하기도 하였다. 북진 당시 인천·은율지구인 구월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였다가 1·4 후퇴 때 실종되었다.
임경업(林慶業 1594~1646)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었다. 친국(親鞫)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 되었다. 숙종 23년(1697) 복관(復官), 연평도 충민사, 충주 충렬사(忠烈祠) 등에 배향되었다.
당섬 선착장 남쪽에 안목 선착장이 있는데 그 건너 쪽에 보이는 작은 바위섬이 모이도이다. 임경업장군이 이 모이도와 안목 선착장 사이의 갯골에다 가시나무를 베어다 세우고 썰물에 나가보니 가시마다 많은 고기가 걸렸다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이곳이 안목살터(안목어장)이다. 이 섬이 안목어장의 제방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고기들의 서식처가 된 것이다. 고기들이 많이 모이는 섬이라 하여 모이도라 부르게 되었다.
임경업장군은 조기잡이신, 어업 수호신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서 전남 흑산도에 이르는 곳곳에 풍어제레 등장한다. 그가 처음으로 조기잡이를 시작한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임경업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신 사당을 충민사라고 일컬으며, 해마다 조기 철에 충민사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고 대동굿을 치른다.
한용녀(韓龍女 1898~1982)
6·25전쟁 때 연평도를 탈환하려는 한국 해군 함정이 확성기로 함포사격 개시를 알리고 주민들이 대피하도록 경고하는 소리를 듣자, 연평도에 공산군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박만업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함정에 다가가게 했다. 젊은이의 전언을 등은 한국 함정이 함포사격을 하지 않아 연평도는 초토화를 모면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백령면

부영발(傅永發 생몰년 미상)
천주교 신부, 부영발이란 한글이름을 지닌 그는 1959년 3월부터 1973년 6월까지 14년간 백령도 천주교회 주임심부로 봉사하였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앓는 자에게 간호를, 집 잃은 자에게 안식처를 준다’는 신념으로 전쟁 속의 외로운 섬 백령도를 사랑하였다. 재임기간 중 고아원, 양로원, 자선병원, 구라회, 기생충통제소, 자살예방센터, 외래 자선치료실 등 많은 사회 활동을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대기(李大期 1551~1628)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임중(任重), 호는 설학(雪壑)이다.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장(倡義將) 정인홍(鄭仁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선조 32년(1599년) 형조정랑, 이듬해 영덕현령, 선조 41년(1608) 청풍군수, 함양군수 등을 지냈다. 문명이 있었다.
광해군 12년(1620) 정원에 70년 고령으로 백령도에 유배되어 4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으며 백령도의 역사와 자연, 민속을 담은 『백령도지』를 저술하였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이대기는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다가 인조 5년(1628)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숙종 28년(1702) 초계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세화(李世華 ?~1238)
고려 고종 7년(1220) 백령진장(白翎鎭將)으로 진촌에 향교를 설립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는 등 인재를 양성하였다.
최경림(崔京琳 1921~1970)
백령도 진촌리 출신이다. 공정하고 근면하며 언변이 정확하고 뛰어난데다가 공사가 분명해서 면민들의 존경을 받은 백령도의 진실한 일꾼으로 평판이 나 있다.
6·25 전쟁 당시 백령면장으로 피난민들이 많이 몰려들자 280정보의 부지 개간 사업을 펼쳐 피난민 300 가구의 정착지를 마련했다. 또한 오늘의 백령중학교의 전신인 백령고등공민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최 면장은 그의 아내 김양겸(金良謙)과 함께 백령도에 천주교를 보급, 전도하는데에도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허간(許侃 1885~1972)
백령면 연화리 중화동 출생이다. 호는 백석(白石)으로 한문을 배운 후,, 13살 때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백령도의 첫 세례자였다. 허간목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배경도 토지권 민영화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한 후 도민들에게 일방적인 소작증을 주고 지세를 6배나 인상하여 강탈하려고 할 때 백령도 도민 대표로 5년간 투쟁하여 백령도 내 토지 전부를 민영화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대청면

김려선(金麗善 생몰년 미상)
대청면 고주동 출신이다. 6·25전쟁 때는 밀어닥친 피난민과 함께 수천 명의 군인들 거소와 식량을 공급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한 대청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김신웅(金信雄 생몰년 미상)
대청면 옥중동에 거주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에 이어 1875년 운요호사건 등 외세 침입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수군(水軍)에 자원하여 훈련을 받던 중, 침입한 운요호를 퇴치시키기 위해 운요호 배 밑을 뚫어 침몰시키는 계책을 세웟는데 이를 자원한 사람이 수영과 잠수에 능한 김신웅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을 감지한 운요호가 불시에 강화도를 탈출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전공이 김신웅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이 파총(把摠, 각 군영의 종4품) 벼슬이었다고 한다.<기록은 없고 구전되고 있음.>
김학선(金學善 1864~?)
중년 이후 대청도에서 보냈다. 1909년에 당국에 진정하여 대청도민에게 포패채조전용어업권 및 각종 어업 면허를 획득케 하여 생활 안정을 기하게 했다. 1913년 토지조사 때 대청, 소청, 산야 전부가 국유지로 편입되자 이에 불복, 대청도 대표로서 당국에 진정하여 1919년에 마침내 민유지로 환원되게 하였다. 1921년에는 후세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비로 대청사숙을 설립하여 숙장(塾長)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 대청도어업조합 설립 인가를 받아 조합장에 취임, 어촌진흥계발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기타 교통 운수 사업과 도민 생활 개선에 공적이 커 수차에 걸쳐 공로 표창을 받은 바 있다. 대청도의 은인으로 불린다.
타환첩목이(妥懽帖睦爾 1320~1370)
원(元)나라 명종 태자이다. 충혜왕 원년(1330) 대청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시의 궁궐터가 내동초등학교 터였다고 하며 내동(內洞) 지명을 고쳐 장안(長安)으로, 그리고 대청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러 이곳을 자기의 도읍지라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기록이 옹진군 향리지에 전한다. 후일 순제(順帝)이다. 대청도 신향이 전설로 남아 있다.

덕적면

김연하(金演河 생몰년 미상)
인조(仁祖) 때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뒤, 덕적도로 낙향한 김홍수(金洪壽)의 후예이다. 소야도에서 살았다. 널리 알려진 한학자로 시문집(詩文集)이 전해지고 있다.
임용우(林容雨 1884~1919)
김포군 월곶면(月串面) 출신으로 통진(通津) 창신학교(昌信學校) 4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3년간 창신학교 교사로 있다가 덕적면 진리의 사립 명덕학교(明德學校) 교사로 옮겨와 8년간 재직하였다.
명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2월 말에 천도교(天道敎) 측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3월 1일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29일에는 윤영규(尹寧圭), 최복석(崔復錫) 등과 월곶면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면서 항일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덕적으로 돌아와 이재관(李載寬), 이동응(李東應), 차경창(車敬昌)과 주동하여 4월 9일 진리 해변에서 명덕학교 운동회를 개최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1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복역 중 고문과 악형으로 인해 옥중 순국(殉國)하였다.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덕적도에 순국비가 있다.
허광모(許光模 생몰년 미상)
덕적 출신으로 자월도 절우물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자월면

전미카엘(全미카엘 ?~1989)
인천 연안천주교회 신부였다. 1980년 초 승봉도 주민들의 식수난 해결을 위하여 에일레해수욕장 위쪽에 개발 공사비를 들여 지하수 개발을 하였다. 주민들이 전 신부의 은덕을 기려 공덕비를 천주교 공소 앞에 세웠다.

영흥면

배익현(裵益鉉 생몰년 미상)
영흥 출신으로 구한말에 무과(武科)에 합격해서 관직에 올라 고종(高宗) 황제의 호위군관이 되었으나, 1907년 8월 우리나라 군대 해산할 때 해직되었다. 이후 의병 활동을 벌이다 기진하여 향리로 돌아왔다.
임병래(林炳來 1922~1950)
평남 용강 출신으로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첩보부대의 창설요원이 되었다.
6·25 전댕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특수공작대의 조장으로 선발되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인천, 서울지역으로 잠입하여 북한군의 상황 등 기밀을 탐지해 우리 해군본부와 미군사령부에 제공하여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9·15 인천상륙작전 개시 전날 영흥도를 점령한 인민군 1개 대대의 공격에 맞서 10여 명의 대원들과 맞서 싸우다가 포위당하자 스스로 자결, 전사하였다.
클라크(Eufene F. Clark ?~1998)
미 해군 대위로 한국 해군정보부대 KLO-8240 부대를 이끌고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은 영흥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는데 최후까지 살아남아 팔미도 등대를 확보한 대원은 유진F. 클라크 해군 대위, 한국군 최규봉(崔奎峰) 분견대장, 계인주(桂仁住) 대령, 연정(延幀) 소령, 존 포스터 미육군중위, 클리크 혼 미 육군소령 등이었다.